[FETV=권지현 기자] #30대 직장인 K씨는 A은행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개설한 계좌가 소액 이체만 가능한 한도제한계좌여서 불편함을 느끼자 일반 입출금계좌로 변경하기 위해 영업점을 방문, 직원으로부터 재직증명서와 급여명세표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K씨의 상황을 들은 직장 동료는 자신이 문의한 B은행은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 한 가지 서류만 요청했다며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도제한계좌'가 금융권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시행된 지 5년이 지났지만 피로감과 불편함이 쌓이면서다. 한도제한계좌는 입출금 계좌를 새로 연 소비자가 각종 증빙서류 등을 내지 못할 경우 인터넷·모바일뱅킹이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하루 30만원, 영업점 창구에서는 하루 100만원까지만 이체할 수 있는 계좌를 말한다. 서류를 제출해야 하므로 은행 앱 등을 통해 비대면으로 계좌를 개설하려면 한도제한계좌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한도제한계좌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급증하는 '보이스피싱'이 있다. 금융감독원은 2012년 보이스피싱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은행연합회와 신규 통장 개설 시 은행이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계좌가 많이 개설될수록 대포통장 등을 활용한 범죄 역시 증가할 가능성이 높아 정확한 목적을 갖춘 계좌만 개설을 허용하겠다는 뜻이다. 당시엔 미성년자와 외국인, 단기간에 여러 계좌를 만든 사람에게만 확인 서류를 받았지만 2015년 7월 모든 신규 계좌 대상으로 확대, 2016년도부터는 한도제한계좌로 완화·시행하고 있다.
취지는 좋지만 당장의 불편함은 소비자의 몫이다. 이를 토로하는 고객에게 '상황'을 설명하느라 영업창구 직원이 에너지를 배로 들이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도제한계좌가 소비자로부터 '원망'을 사는 요인은 크게 세 가지다.
그중 제일은 '내 돈도 마음대로 찾지 못한다'는 불편함이다. 당장 수백만원 이상을 이체해야 하는 고객에게는 소액으로 묶인 한도제한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모바일뱅킹을 통해 한도제한계좌에서 300만원을 이체하려면 10일, 영업점을 방문할 경우 3일이 소요된다. 요즘 같은 비대면·디지털금융 시장에선 더욱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한도제한계좌의 불편함을 피하고자 한도제한을 풀거나 아예 영업점에서 신규로 계좌를 만들 경우 은행마다 요구하는 서류가 제각각이라는 점도 불만이다. 통상 신규 계좌는 급여·법인(사업자)·모임·공과금이체·아파트관리비·아르바이트·사업자금계좌 중에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급여 계좌 개설을 위해서는 재직증명서·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급여명세표가 필요하며, 아르바이트통장을 개설하려면 고용주의 사업자등록증(사본) 외에 근로계약서·급여명세표 등의 고용확인 서류가 필요하다.
같은 은행이라도 지점마다, 심지어 한 지점 내 창구 직원마다 요구하는 서류가 다를 때도 있어 소비자의 분통을 키우기도 한다. 기자가 직접 서울 종로구 소재 B은행 같은 영업점에 이틀 연속 방문, 신규 계좌 개설(급여 계좌)을 위해 필요한 서류를 문의하자 전날에는 직원 O씨로부터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 다음날에는 직원 M씨로부터 재직증명서와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이 필요하다는 답을 들었다.
'실효성' 또한 소비자들이 갖는 불만이다. 한도제한계좌를 통해 과연 보이스피싱 피해가 줄었는지의 여부다. 시중은행 영업점 한 직원은 "금융당국이 한도제한계좌를 만든 데는 보이스피싱이 매일 100건가량 일어나는 상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서 "고객의 반응을 보면 한도제한계좌 도입 이후 보이스피싱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고객의 불만만 키운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소비자 불만에 대한 금감원의 생각은 무엇일까.
먼저 실효성 관련, 금감원이 지난 6일 발표한 '2021년 상반기 보이스피싱 피해 현황'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845억원으로 1년 전(1577억원)보다 46.4%(732억원) 줄어들었다. 1년 단위로는 지난해 2353억원을 기록, 2019년 6720억원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2019년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나 지난해 감소세로 처음 돌아섰다. 한도제한계좌가 '진정한' 실효성을 증명하려면 이 계좌가 도입된 2016년 이후부터 순차적으로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줄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곽원섭 금감원 사기대응팀 팀장은 "'사기'라는 범죄 관련 통계는 어떠한 상황이 변한다고 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곧바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변수들과 이에 따른 인지가 축적돼 서서히 드러나는 경향을 보인다"면서 "한도제한계좌는 2016년에 본격적으로 도입됐으나 직접적인 보이스피싱 감축 효과로 이어지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린 것으로, 지난해 피해액과 올 상반기 피해액이 처음으로 줄어든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소액 이체 한도에 따른 고객 불편함 역시 알고 있으나 소수의 극심한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기 위해 다수의 공감대가 일정 부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곽 팀장은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소수이지만 피해 규모와 그 여파는 대중이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라며 "한순간에 한 가정을 파탄 낼 수도, 한 사람을 개인회생자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 보이스피싱"이라고 말했다.
실제 피해 사례는 이를 입증한다. 지난 2월 P씨는 딸이 자주 사용하는 문자 말투와 이모티콘까지 사칭한 보이스피싱으로 2400만원의 피해를 입었으며, J씨의 경우 지난 6월 가족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에 속아 보낸 대출금 3000만원이 대포통장 20개로 분산 이체됐다. 누구나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대포통장이 될 빌미를 없애는 것이 보이스피싱 피해를 줄이는 데 효과가 있다는 얘기다. 이보다 피해금액이 클 경우 가정과 사람이 무너지는 경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도제한을 풀어 일반계좌로 개설할 경우 구비해야 할 서류가 제각각인 것에 대해 금감원은 은행 자율성에 따른 것으로, 요청 서류가 획일적인 것에 대해 역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다만 같은 은행이라도 지점, 직원마다 요구하는 서류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개선 가능성을 열어뒀다.
곽 팀장은 "이체한도와 관련 서류 목록의 경우 은행에게 자율성을 부여한 부분"이라며 "오히려 모든 은행이 같은 서류를 요구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범죄 관련자들에게 쉽게 목록이 노출, 계좌개설을 제한하고자 하는 원래 취지가 퇴색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금감원 한 관계자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충분한 논의를 거쳐 보완해야겠지만 올해 수치로 드러났듯이 현재로서는 보이스피싱 피해를 줄이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한도제한계좌라고 생각한다"면서 "당장 나조차 아들의 이름으로 계좌를 개설하려고 해도 불편을 겪는 상황이지만 소수의 극심한 피해를 막기 위해 다수가 조금만 더 불편을 감내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