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우리 역사 속의 커피사건이 세상에 퍼져 나가게 되었지만 당시 고종의 지원을 받은 해외유학파들이 모이던 손탁호텔에서는 구미의 외교관들에게 커피를 대접했고, 종군기자로 조선을 방문했던 마크 트웨인도 손탁호텔에 머물며 커피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10년8월 한일병합 이후 국권을 상실한 조선에 암흑이 드리워지면서 1919년 3.1운동 이전까지는 일제의 잔혹한 무단통치로 커피와 관련된 기록을 더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3.1운동 이후에 문화통치로 이행되면서 조선인도 문화예술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고, 지식인들이 다방을 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조선인 최초로 다방을 차린 것은 이경손이라는 사람이며, 영화 <밀정>에 등장하는 ‘카카듀’가 바로 그곳이다. 시인 이상은 1933년 종로 청진동에 ‘제비’라는 다방을 오픈했다. 이후 6개의 다방을 열었는데, 모두 창작과 계몽의 의지를 불사르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각성과 조선인들의 문화교류를 시도한 곳들이라고 할 수 있다.(중략) 더 보고 싶은가요? 아래를 클릭해 주세요.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커피를 제공하는 곳에서 커피 자체의 맛있음을 제공하는 것은 역사상 ‘의외로’ 드문 일이다. 유럽의 커피하우스나 카페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교류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커피를 한꺼번에 만들어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맛있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호사가들의 개인적인 취향이었거나 여유있는 계층의 특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은 서민층에서 ‘맛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독자적인 커피 문화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일반인들이 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1910년 이후다. 브라질 정부가 남아도는 생두를 일본에 무상으로 공급하게 된 것을 계기로, 커피 프랜차이즈도 전국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1930년대에는 최초의 킷사텐(커피숍) 붐이 일게 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커피가 전면 수입 정지되었고,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된 커피 부족 현상은 전쟁 전의 커피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커피 부흥의 노력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생두 수입 자유화로 일본 커피시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70년대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커피나 할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카페를 오픈하는 사람들로 넘쳐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역사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커피 로스팅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자. 커피는 원료가 되는 생두(green bean)를 불에 볶아야만 커피다운 맛과 향이 만들어진다. 커피를 볶는 과정을 로스팅(배전)이라고 하는데, 이 때 두 차례 구간에서 독특하게 ‘튀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그 두 번의 구간-1차크렉, 2차 크렉 또는 1차 팝, 2차 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을 기준으로 향미의 변화가 크게 일어나기 때문에 프로들은 그 구간을 디테일하게 ‘쪼개고’ 선택하여 원하는 맛의 포인트에서 로스팅을 끝마친다. 로스팅을 끝마치는 포인트에 따라서, 라이트(light), 시나몬(cinnamon), 미디엄(medium), 하이(high), 시티(city), 풀 시티(full city), 프렌치(french), 이탈리안(Italian) 등 8단계로 구분하며, 일본, 한국, 대만 등에서는 약배전(light~high), 중배전(high~city), 강배전(city~italian)이라고 하는 등 국가나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불리고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미디움, 시티, 풀 시티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을까. 1922년에 출간된 이후 커피의 바이블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커피 생산 프로세스에 대해서도 생소한 사람이 많을 텐데, 오늘은 설탕 만드는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설탕의 원료는 사탕수수다. 키가 4미터 정도 되는 수숫대를 잘라 끌고 온 다음 그것을 으깨서(사람 또는 기계가) 시럽을 만들고, 이를 큰 통에 넣고 끓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수숫대는 베면 바로 직후부터 굳어버리기 때문에 그 전에 빨리 운반해야 하고, 주어진 시간 안에 끓는 통에 넣어 작업을 마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문에 플랜테이션이라는 대형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고, 이에 필요한 인력은 노예나 전쟁 포로들로 충당했다. 1500년대부터 본격적인 신대륙 탐험이 이어졌고, 사탕수수 재배가 가능한 비옥한 토지를 찾아 나서는 나라가 많았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세계 곳곳을 탐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콜럼버스다. 그가 찾아간 곳 중 하나인 ‘히스파니올라(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라는 섬에는 특히 거대한 설탕 플랜테이션을 만들어 지원과 정책이 아낌없이 실행되었다. 다른 섬들에도 유사한 과정으로 설탕 플랜테이션이 만들어져 가동되었고, 이후 몇 백 년간 아프리카인들이 자메이카나 아이티, 쿠바 등을 향해 대서양을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 <아웃 어브 아프리카>에서 여주인공 카렌(메릴 스트립)은 케냐에서 커피농장을 경영한다. 연인이었던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세렝게티 초원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피크닉을 즐기는 장면은 많은 이들의 로망이 되었다. 그 곳에, 행동하는 작가 헤밍웨이가 있었다. 그는 탕가니카 커피농장을 가진 지인의 소개로, 케냐와 탄자니아에 걸친 이 세렝게티 초원을 누비며 사냥과 낚시를 즐겼다. 그렇게 그의 자전적 소설 <노인과 바다>가 탄생했다. 헤밍웨이가 쿠바에 살면서 멕시코만을 배경으로 쓴 마지막 소설 <노인과 바다>. 어부 산티아고가 먼 바다로 나가 청새치와 전쟁(!)을 치르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쓰러졌을 때, 소년 마놀린이 노인에게 뜨거운 커피를 가져다 준다.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은 한 잔을. 그렇게 쿠바커피는 헤밍웨이의 커피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거의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 나온 작품이니, 얼마나 각별한 의미가 있었겠는가. 자신이 죽었는지 의심될 정도로 지친 노인은, 헤밍웨이 그 자신이었고, 그런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카페는 그야말로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다. 당시 유럽의 상인들은 최신 비즈니스 정보를 커피하우스에서 얻을 수 있었다. 상인들뿐만 아니라, 과학자와 정치가들에게도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였다. 지금에야 인터넷을 이용하여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때는 카페가 정보의 발원지였던 것이다. 실제로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졌던 일들이 지금의 보험, 복권, 금융에 이르기까지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냈다. 해상 뉴스를 접하고 화물 경매를 한다든지, 이러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요약하여 정기적으로 뉴스레터를 발행하기도 했다. 보험을 계약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장소가 되어 카페 공간을 임대하기도 하고,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이후 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또, 회사 정보가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주식시장으로서의 기능도 더불어 수행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커피하우스를 자신의 우편주소(사서함 같은)로 정해서 우편물을 배달시키기도 했다고 하니, 이 또한 혁명에 가까운 기능의 탄생이 아니었을까. 영국에 커피하우스가 유행했을 당시의 사회 상황은 이러했다. 1649년 청교도 혁명으로 시민이 지지하는 의회파가 국왕파에게 승리를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커피가 음용되기 시작했던 500여 년 전부터 커피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과 금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존재였다.오래 전 이슬람 세계에서는 커피금지령이 내려져 몰래 마시다 발각되면 즉각 사형이었던 때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인체에 유해하다’며 술처럼 정신에 영향을 주는 나쁜 음료라는 근거 없는 이유를 들어 비판과 금지령이 내려진 것이었지만 실은 커피 자체보다는 ‘카페하네’라는 장소가 문제였다. 시민들의 교류의 장으로 소문과 정치 공작의 산실을 규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슬람교의 정치 지배력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특히 커피(혹은 커피가 있는 곳)가 감시와 제재의 대상이 된 것인데, 이러한 규제와 형벌에도 커피와 카페하네는 16세기 이후 이슬람권에서 시민권을 확보해 갔다. 지금은 홍차하면 영국이지만, 그 전에 영국은 이미 ‘커피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커피가 유행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하우스에 머물렀는데, 이곳은 커피 한 잔 값만 지불하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1페니 대학’이라고도 불리웠던 장소였다. 그 당시 물이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중세 유럽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덩치가 꽤나 큰 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양분이 많은 맥주와 맥주 수프를 얼마나 섭취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맥주는 제조과정에서 끓이는 덕분에 안심하고 마실 수 있었고, 원료 중 하나인 홉은 방부효과가 있어서 장기간 보존도 가능했다. 때문에, 물을 대신할 수 있었고, 빵 다음으로 영양을 섭취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일상에서 맥주를 마셨다.이처럼, 맥주는 커피가 유럽으로 전해지기도 전에 이미 유럽 전역에 정착해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 커피가 유럽에 등장한 것이다. 오스만투루크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을 두 번이나 포위하고 공격했는데, 그 두 번째 포위전을 기점으로 오스트리아에 커피가 보급되고 유럽으로 확산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맥주소비가 가장 많았던 시대, 15~17세기 사이에 사람들은 맥주를 요즘처럼 일반 술집에서만 마시지는 않았다.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맥아 및 양조 제조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 주로 마셨다. 맥주가 일상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말 그대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커피에 관한 이야기 중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일에 집중하고 싶을 때나 잠을 깨고 싶을 때, 주로 찾는 것은 액체로 된 커피지만 인류 최초의 커피는 음료가 아니라 분쇄한 커피가루를 동물기름(버터)과 섞어 둥글게 반죽한 덩어리 형태였다고 한다. 그냥 씹고 뱉었는지, 덩어리를 떼어내어 물에 끓여 마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커피 덩어리’의 용도는 호전적이었던 민족이 전쟁에 나갈 때 전투력 향상을 위해 지참했던, ‘에너지 볼’이었다고 한다. 전투에 활용된 이 에너지 볼과 함께 기원전 2~3세기 에티오피아에서는 부족간 전투를 앞두고 전사들의 힘과 정신을 북돋우려고 전쟁을 위한 ‘커피의식’을 치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의식이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분나 마프라트’라는 관습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기원 전부터 커피는 이미 인류의 전쟁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커피는 원래 숲 속에 자생했던 식물이었고, 이를 채취해 의식에 쓰거나 전쟁에 사용하거나 했었다. 그렇다면, 에티오피아가 고향인 커피나무가 어떻게 최초로 예맨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최근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피어 오르는 향긋함과는 사뭇 다른, 거칠고 굽이치는 역사를 거쳐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음료가 된 커피.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커피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였을까. 나는 주저 없이 나폴레옹이라고 말하고 싶다. 워낙 소설 같은 일화가 많은 위인이라 커피와 관련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전해지지만 젊은 나폴레옹이 얼마나 커피를 좋아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그럼에도 전장의 군인들에게 보급품으로 지급할 정도로 커피의 효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포화가 사라진 막간의 참호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얼마나 큰 의지가 되었을까. 위로와 함께 따뜻한 휴식을, 그리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픈 희망을 키워 주지 않았을까. (아마도 나폴레옹은 군사들의 각성과 운동능력의 향상을 위해서 였겠지만.) 솔직히 나폴레옹과 술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기는 하다(웃음). 나폴레옹이 역사에 등장한 시점은 이미 커피 없이는 살기 힘들어진(?) 카페 전성기인 18세기 말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카페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막을 내리게 된 사회적 격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