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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人文學


커피가 이끈 세계의 역사

  • 기자
  • 등록 2019.05.07 08:43:16
  • 수정 2019.05.07 08:44:04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카페는 그야말로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다. 당시 유럽의 상인들은 최신 비즈니스 정보를 커피하우스에서 얻을 수 있었다. 상인들뿐만 아니라, 과학자와 정치가들에게도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였다. 지금에야 인터넷을 이용하여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때는 카페가 정보의 발원지였던 것이다.

 

실제로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졌던 일들이 지금의 보험, 복권, 금융에 이르기까지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냈다. 해상 뉴스를 접하고 화물 경매를 한다든지, 이러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요약하여 정기적으로 뉴스레터를 발행하기도 했다. 보험을 계약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장소가 되어 카페 공간을 임대하기도 하고,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이후 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또, 회사 정보가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주식시장으로서의 기능도 더불어 수행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커피하우스를 자신의 우편주소(사서함 같은)로 정해서 우편물을 배달시키기도 했다고 하니, 이 또한 혁명에 가까운 기능의 탄생이 아니었을까.

 

영국에 커피하우스가 유행했을 당시의 사회 상황은 이러했다. 1649년 청교도 혁명으로 시민이 지지하는 의회파가 국왕파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영국은 시민사회의 여명기를 맞이한다. 귀족들이 궁정과 살롱을 사교장으로 이용했던 것처럼, 시민에게도 정치의견을 교환하거나 모여서 수다를 떨 수 있는 ‘교류의 장’이 필요했으니, 그 무대가 바로 커피하우스였던 것이다.

 

넘쳐나는 대화와 정보들은 시민을 각성시키고 동시에 교육과 문학, 철학적 탐구, 상업적 발전 등으로 이어졌으리라.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이성의 시대에 이를 가능케 했던 인터넷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런던과 마찬가지로 파리의 카페들도 지식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그러나 런던에서는 정치 토론의 장소로서 제약을 받지 않았으나, 파리는 조금 달랐다. 정치 정보의 순환에 대해 엄격하게 정부의 규제를 받고 있었고, 그런 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대해 자유를 주장하고, 정부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바스티유 감옥에 가야만 했다. 사실, 어느 시대에나 규제와 단속이 있다면 이를 피해 교묘히 빠져나가는 곳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파리의 카페는 국가가 지정한 폐점 시간을 지키지 않았고,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몰래’의 공포 속에서 술을 마셨을까, 커피를 마셨을까. 필연적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 음료를 택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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