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카페는 그야말로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다. 당시 유럽의 상인들은 최신 비즈니스 정보를 커피하우스에서 얻을 수 있었다. 상인들뿐만 아니라, 과학자와 정치가들에게도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였다. 지금에야 인터넷을 이용하여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때는 카페가 정보의 발원지였던 것이다. 실제로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졌던 일들이 지금의 보험, 복권, 금융에 이르기까지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냈다. 해상 뉴스를 접하고 화물 경매를 한다든지, 이러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요약하여 정기적으로 뉴스레터를 발행하기도 했다. 보험을 계약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장소가 되어 카페 공간을 임대하기도 하고,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이후 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또, 회사 정보가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주식시장으로서의 기능도 더불어 수행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커피하우스를 자신의 우편주소(사서함 같은)로 정해서 우편물을 배달시키기도 했다고 하니, 이 또한 혁명에 가까운 기능의 탄생이 아니었을까. 영국에 커피하우스가 유행했을 당시의 사회 상황은 이러했다. 1649년 청교도 혁명으로 시민이 지지하는 의회파가 국왕파에게 승리를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커피가 음용되기 시작했던 500여 년 전부터 커피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과 금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존재였다.오래 전 이슬람 세계에서는 커피금지령이 내려져 몰래 마시다 발각되면 즉각 사형이었던 때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인체에 유해하다’며 술처럼 정신에 영향을 주는 나쁜 음료라는 근거 없는 이유를 들어 비판과 금지령이 내려진 것이었지만 실은 커피 자체보다는 ‘카페하네’라는 장소가 문제였다. 시민들의 교류의 장으로 소문과 정치 공작의 산실을 규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슬람교의 정치 지배력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특히 커피(혹은 커피가 있는 곳)가 감시와 제재의 대상이 된 것인데, 이러한 규제와 형벌에도 커피와 카페하네는 16세기 이후 이슬람권에서 시민권을 확보해 갔다. 지금은 홍차하면 영국이지만, 그 전에 영국은 이미 ‘커피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커피가 유행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하우스에 머물렀는데, 이곳은 커피 한 잔 값만 지불하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1페니 대학’이라고도 불리웠던 장소였다. 그 당시 물이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중세 유럽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덩치가 꽤나 큰 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양분이 많은 맥주와 맥주 수프를 얼마나 섭취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맥주는 제조과정에서 끓이는 덕분에 안심하고 마실 수 있었고, 원료 중 하나인 홉은 방부효과가 있어서 장기간 보존도 가능했다. 때문에, 물을 대신할 수 있었고, 빵 다음으로 영양을 섭취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일상에서 맥주를 마셨다.이처럼, 맥주는 커피가 유럽으로 전해지기도 전에 이미 유럽 전역에 정착해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 커피가 유럽에 등장한 것이다. 오스만투루크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을 두 번이나 포위하고 공격했는데, 그 두 번째 포위전을 기점으로 오스트리아에 커피가 보급되고 유럽으로 확산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맥주소비가 가장 많았던 시대, 15~17세기 사이에 사람들은 맥주를 요즘처럼 일반 술집에서만 마시지는 않았다.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맥아 및 양조 제조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 주로 마셨다. 맥주가 일상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말 그대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커피에 관한 이야기 중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일에 집중하고 싶을 때나 잠을 깨고 싶을 때, 주로 찾는 것은 액체로 된 커피지만 인류 최초의 커피는 음료가 아니라 분쇄한 커피가루를 동물기름(버터)과 섞어 둥글게 반죽한 덩어리 형태였다고 한다. 그냥 씹고 뱉었는지, 덩어리를 떼어내어 물에 끓여 마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커피 덩어리’의 용도는 호전적이었던 민족이 전쟁에 나갈 때 전투력 향상을 위해 지참했던, ‘에너지 볼’이었다고 한다. 전투에 활용된 이 에너지 볼과 함께 기원전 2~3세기 에티오피아에서는 부족간 전투를 앞두고 전사들의 힘과 정신을 북돋우려고 전쟁을 위한 ‘커피의식’을 치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의식이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분나 마프라트’라는 관습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기원 전부터 커피는 이미 인류의 전쟁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커피는 원래 숲 속에 자생했던 식물이었고, 이를 채취해 의식에 쓰거나 전쟁에 사용하거나 했었다. 그렇다면, 에티오피아가 고향인 커피나무가 어떻게 최초로 예맨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최근
[윤선해=후지로얄코리아 대표] 피어 오르는 향긋함과는 사뭇 다른, 거칠고 굽이치는 역사를 거쳐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음료가 된 커피.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커피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였을까. 나는 주저 없이 나폴레옹이라고 말하고 싶다. 워낙 소설 같은 일화가 많은 위인이라 커피와 관련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전해지지만 젊은 나폴레옹이 얼마나 커피를 좋아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그럼에도 전장의 군인들에게 보급품으로 지급할 정도로 커피의 효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포화가 사라진 막간의 참호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얼마나 큰 의지가 되었을까. 위로와 함께 따뜻한 휴식을, 그리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픈 희망을 키워 주지 않았을까. (아마도 나폴레옹은 군사들의 각성과 운동능력의 향상을 위해서 였겠지만.) 솔직히 나폴레옹과 술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기는 하다(웃음). 나폴레옹이 역사에 등장한 시점은 이미 커피 없이는 살기 힘들어진(?) 카페 전성기인 18세기 말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카페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막을 내리게 된 사회적 격동기
[이주익=영화제작자]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은 해마다 인구 두 명에 한 명꼴로 해외로 나간다. 일본은 7명에 한 명꼴로 해외여행을 하니,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보다 3.5배 더 해외를 나가는 셈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국토가 넓고 국내 여행 인프라가 잘 되어 있는 등 해외를 덜 찾는 이유를 이런저런 데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한때 우리보다 훨씬 자주 해외여행을 다니던 일본인들의 여행 의욕이 이제 옛날 같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젊은 세대가 해외여행을 하며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우려는 의욕이 낮아진 것이 각종 수치에서도 나타나, 일본 정부도 이러한 경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대학생들이 해외여행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지 나아가 재정적 지원까지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기사를 작년에 읽은 적이 있다.이에 반해 한국의 젊은 세대는 구직자 대비 일자리가 부족한 심각한 취업난이 사회문제가 된 지도 꽤 되었는데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일본에 비해 훨씬 많다. 지리적으로는 반도이지만 분단으로 인해 섬처럼 고립된 국토에 갇혀 답답해 하다가 여건이 되니 그 옛날 말을 타고 대륙을 쏘다니던 노마드의 유전자가 발현한 게 아닐까 싶
[이주익=영화제작자] 뉴욕 맨하탄을 거닐다 보면 ‘델리(Deli)’라는 간판이 매우 흔하게 골목마다 하나 이상은 눈에 띈다. 이는 원래 ‘델리카트슨’이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유럽에서 이민 온 유태인들에 의해 1800년대부터 보급된 업태다. 처음엔 코셔 식품을 주로 취급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며 뉴욕에서 미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영업스타일도 변했다고 한다. 지금은 ‘델리’라고 하면 미리 만들어놓은 샌드위치류나 샐러드 등을 파는 조그만 가게에서부터 간단한 식료품점까지 겸하는 곳 아니면 거기에 더하여 주문을 받고 각종 음식을 만들어 주는 카페테리아까지 규모와 내용이 다양하다.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뉴욕이니 만큼 이탈리안 델리, 그리스 델리 더 나아가 멕시칸 델리, 아시안 델리 등 다양한 델리가 생겨났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나오는 카츠 델리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다. 필자도 뉴욕에 갈 때마다 이걸 먹으려고 꼭 한번은 들르곤 하는데 콘비프 샌드위치, 브리스킷(양지살) 샌드위치, 필리치즈 샌드위치도 어느 가게에 뒤지지 않을 만큼 맛이 좋아서 둘 이상이 가면 골고루 시켜서 나눠먹곤 한다. 이 곳은 영화 속에서 맥 라이
[이주익=영화제작자] 중국에서 생겨나 한국, 일본으로 전파된 만두를 바탕으로, 지금 세 나라는 모두 개성이 다른 군만두 문화를 갖고 있다. 군만두는 말 그대로 만두를 구운 것이다. 그러니까 군만두 이전에 만두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선 만두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겠는데, 먼저 용어부터 정리를 해보자. 우리가 만두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사람들이 쟈오즈(교자:餃子) 또는 빠오즈(包子)라고 부르는 것이고, 만두라고 하는 한자어는 만터우(饅頭)라고 하여 중국에서는 우리가 중국집에서 시키는 꽃빵(花捲)을 크고 딱딱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냥 소가 들어있지 않은 밀가루 빵을 일컫는 단어로 쓰인다. 여기에 생파나 마늘을 중국된장에 찍어 함께 먹는 것이 가난했던 사람들의 식사이기도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대도시의 건설현장에 투입된 동베이(東北)지방 출신 일용노동자들의 식사는 그냥 만터우 한두 개에 마늘, 생파 정도였던 시절이 있었다. 정리하면 우리가 설날에 먹는 만두는 교자, 분식집에서 파는 동그란 고기만두나 찐빵 같은 것, 다시 말해 표면에 수분이 없어서 손으로 들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빠오즈다. 일본에서는 교자를 ‘교자(ぎょうざ:
[이주익=영화제작자]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배우 이병헌은 참 연기를 잘한다. 멜로에서 액션까지 뭘 해도 역할을 잘 소화해내어 그만이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좋으니 요새 표현을 빌자면 전생에 어디서 나라 하나는 구했지 싶다. 영화 ‘광해’에서 이병헌은 광해군과 그가 몸 져 누웠을 때 등장한 대역, 1인 2역을 맡아 명연기를 펼친다.‘광해’에서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기방에서 만담이나 늘어놓던 시정잡배 하선(이병헌)이 왕이 되어 처음으로 수라상을 받은 모습이다. 그는 진짜 왕이 아니므로 너무 품위 있게 먹어서는 안 되는 설정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스럽게 먹으면 그것도 오버일텐데 시장기가 도는 사람이 진수성찬을 대했는데 지켜보는 시선이 많을 때만큼 딱 적당하게 맛있게 먹는다. 사실 이렇게 먹기가 쉽지가 않다.특정인을 꼬집어 비난할 의도는 없이 솔직하게 한마디 하고 넘어가자면, 우리나라 TV에 먹는 장면이 나오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가 많다. 너무나 지저분하게 먹는 연기자들이 많아서 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설정상 게걸스럽게 먹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해가 가는데 재벌 회장 네 밥상머리에서도 쩝쩝거리고 점잖아야 할 집에서
[이주익=영화제작자]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 주제가의 가사다. 이 영화는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미남스타 신성일과 인기절정의 여배우 엄앵란이 주연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위의 가사에서 보이듯이 뒷골목 건달이 신분상 넘을 수 없는 상류사회에 속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는 순애보의 이야기다. 미리 밝히고 넘어가자면,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그렇게 자랑할만한 영화는 아니다. 바로 일년 전 일본에서 제작된 ‘진흙투성이의 순정’이라는 영화를 그대로 베껴온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의 사회 전반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러한 표절 또는 ‘번안’작품이 많았다는 부끄러운 과거까지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건 그것대로 소중한 영화사적 자료일 것 이다. 필자가 이 영화를 얘깃거리로 삼는 것은 영화의 내용이나 오리지널 영화와의 차이 등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영화 속에 의도하지 않게 담긴 당시의 풍속도가 흥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잠깐 이야기 했듯이 지체가 높은 집 규수의 외동딸과 그걸 넘보아서는 안 될 무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