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보험업계 CEO들은 지난해 11월 손보협회에서 사장단 회의를 개최하고 '소비자 신뢰회복과 가치경영'을 위한 자정결의를 했다. [사진=FETV DB]](http://www.fetv.co.kr/data/photos/20200731/art_1595922503066_ac1274.jpg)
[FETV=권지현 기자] 손해보험사 최고경영자(CEO)들의 얼굴이 머쓱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자리에 모여 ‘내부 싸움 자제’ 결의를 한지 8개월 만에 운전자보험 시장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다. 손보업계의 자정결의가 무색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작년 11월 손보사 CEO 17명 전원은 사장단 회의를 열고 ‘흙탕물 싸움 자제’를 위한 자율결의를 다짐했다. 이 같은 결의는 저금리·손해율 악화 등의 업황 속에서 소비자 보호 등에 힘쓰자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최근 손보사들의 운전자보험 판매 과정에서 경쟁사 깎아내리기, 시책 경쟁 등의 부작용이 양산되고 있다.
28일 손해보험업계에 따르면 '운전자보험'이 손보사의 새로운 격전지가 되고 있다.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내 교통사고 운전자 처벌 강화를 위한 ‘민식이법(도로교통법·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지난 3월 시행 이후 각 손보사들은 가격을 낮추고 보장범위를 확대하며 운전자보험 가입자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운전자보험은 운전자에게 생긴 피해를 주로 보장하는 상품이다. 자동차보험과 달리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보험은 아니지만 민식이법 영향으로 최근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난 4월 주요 손보사(삼성화재·현대해상·DB손보·KB손보·메리츠화재·한화손보)의 운전자보험 신계약 건수는 72만311건으로 전년 동기(19만766건) 대비 265% 급증했다. 특히 DB손보는 3월 1일부터 21일까지 3주간 운전자보험 6만건을 판매했다. 36억원에 달하는 실적이다.
운전자보험 판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경쟁사를 깎아내리는 모습도 나타난다. DB손보와 KB손보는 ‘전치 6주 미만 경상 사고 형사책임보장 특약’의 효용성을 두고 공방전을 벌이는가 하면 운전자보험 판매와 관련된 보도자료 배포를 놓고도 신경전을 벌였다.
특히 5월 초 DB손보는 삼성화재가 자신들의 운전자보험 배타적사용권을 침해했다며 손보협회 신상품심의위원회에 이의신청을 했다. DB손보는 지난 4월 ‘6주 미만 상해사고 형사합의금 비용’을 업계 최초로 보장해 특허권인 배타적사용권 3개월을 획득했다. 그 후 삼성화재가 ‘스쿨존 내 6주 미만 사고’에 한해 별도 특약으로 교통사고처리지원금을 500만원 한도로 보상받을 수 있도록 약관을 변경하자 DB손보가 배타적사용권을 침해했다며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DB손보 관계자는 “이번 이의신청은 배타적사용권이 무력화되는 것을 막고자 진행하게 됐다”며 “현재까지 배타적사용권 위반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는 것은 각사의 합의가 존중되고 있다는 뜻이므로 앞으로도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의 경쟁질서가 유지됐으면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삼성화재는 '계약자 보호'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삼성화재 관계자는 “약관변경은 민식이법 도입으로 스쿨존 사고 양형 기준이 강화됨에 따라 고객 보호 차원에서 보장 공백의 보완이 필요했기 때문에 진행한 것”이라며 “과거에도 법 개정에 따른 고객의 보장 공백 우려 시 보험료율 변경 없이 보장을 확대 적용해왔다”고 설명했다.
손보사 간 시책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시책이란 보험사들이 독립법인대리점(GA) 소속 설계사들에게 보험상품 판매 수수료 외에 추가로 얹어주는 일종의 성과급·물품이다. 앞서 손보사 CEO들은 건전한 경쟁을 위해 과도한 시책 등을 자제하는 것을 합의했었다.
DB손보는 운전자보험에 현금시책 추가 100% 지급과 더불어 물품시책도 진행하고 있다. 흥국화재는 운전자보험에 추가로 100% 시책을 지급하는 동시에 4, 5월 연속 월초 30만원 달성 시 현금 60만을 별도 지급했다. KB손보, 메리츠화재, 한화손보, 롯데손보 등도 운전자보험에 대해 별도로 100% 시책을 추가로 지급한다.
보험 전문가들은 민식이법에 따른 수요 증가와 더불어 운전자보험의 자동차보험 대비 낮은 손해율이 손보사들의 경쟁이 격화되는 원인으로 보고 있다.
보험개발원에 자료에 따르면 자동차보험 손해율은 최근 3년간 꾸준히 증가했다. 작년 자동차보험 손해율은 91.4%로 전년 대비 5.5%포인트 늘었다. 손해율이 91.4%라는 것은 보험료 100원을 받아 보험금으로 91.4원을 지급했다는 의미다. 업계는 자동차보험 적정 손해율을 77~80%로 보고 있다. 반면 운전자보험 손해율은 70%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낮은 손해율뿐만 아니라 운전자보험은 쏠쏠한 캐시카우(현금 창출원)로서의 이점도 있다. 보험료는 저렴하지만 적자는 잘 나지 않아 손보사들이 선점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분석이다.
대형 손보사 관계자는 “운전자보험은 한번 가입하면 3·5·7·15년 납입인 장기보험의 성격을 갖는다”며 “요율이 정해진 공적보험의 성격인 자동차보험보다 기업의 사적 상품의 성격을 지닌 운전자보험이 보험사 입장에서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손보업계는 손보사 간 '선의의 경쟁'을 통해 운전자보험 시장의 성장을 꾀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쫓기 보다 공정 경쟁을 통해 전체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손보업계 한 관계자는 “소비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업계 출혈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보험사 간 선의의 경쟁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