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http://www.fetv.co.kr/data/photos/20201043/art_16035918405068_9fb706.jpg)
[FETV=김윤섭 기자] 이건희 회장 체제는 삼성에게 가장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리던 시기였다. 매출은 87년 취임 당시 9조9,000억원에서 2014년 400조원으로 무려 40배나 늘었고 종업원 수 역시 1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늘었다. 2019년 삼성전자 매출액 230조원이 그해 정부예산 469조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현실은 한국 경제에서 삼성전자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양보다는 질” 그룹 변화 이끈 이건희표 리더십=이 회장은 지난 1942년 1월 9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5학년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중학교 때 한국에 귀국해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65년 와세다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66년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1966년 동양방송의 이사로 공식석상에 나섰으며 이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1967년 결혼했다. 삼성그룹에 본격적으로 나선건 1978년 삼성물산의 부회장을 맡으면서다. 이듬해인 79년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올라섰으며 87년 선친인 故이병철 명예 회장이 타계하면서 삼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이건희 회장이 재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던 것은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 호텔에 200여명의 삼성 임원들을 모아놓고 '마누라와 자식만 빼놓고 다 바꾸라'는 자기로부터의 혁신을 강조한 '삼성 신경영'을 선언하면서다.
이후 그룹 간부들과 함께 68일간 유럽과 일본의 산업현장을 돌아보며 자신의 경영철학을 설파하는 ‘벤치마킹 그랜드투어’를 했다. 그는 “(회사 미래를 생각하면)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아 1년 전부터 하루 3~5시간 밖에 못잤고 깨어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고 위기론을 설파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저렴한 가격과 무난한 기능을 경쟁력으로 삼는 게 기본전략인 기업이었다. 양보다는 질로 승부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질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며 수원사업장 세탁기 조립라인에서 작업자들이 금형 사출 불량으로 닫히지 않는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일일이 깎아서 조립하는 모습을 고발하는 사내방송 영상을 보여준 뒤 “마누라와 자식빼고 다 바꾸자”고 주창했다. 이후 불량품이 나오면 해당 생산라인 가동을 전면 중단하는 ‘라인스톱제’까지 도입하면서 품질 제고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1995년 3월 구미공장 ‘무선전화기 화형식’은 상징적이다. 당시 무선전화기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자, 이 회장은 질책하며 불량제품 15만대(150여억원어치)를 수거해 공개 화형식을 가진 것은 이회장의 신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 반도체·스마트폰 글로벌 1위에는 과감한 결단력=최고의 자리에 오른 메모리반도체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의 성공에도 이 회장의 통찰력있는 리더십과 과감한 결정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건희 회장은 74년 자신의 사재를 사용해 한국 반도체의 지분 50%을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어 1977년 미국 ICII가 가지고 있던 나머지 지분 50%도 인수했으며 1978년 3월에는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했다. 당시 파산직전의 한국 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다. 국내에선 자본, 기술, 시장이 없기 때문에 삼성의 반도체는 안된다는 게 업계 중론이었다.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무려 50여 차례나 드나들며 인력 확보에 나섰고 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사업에 자신감을 얻었다. 1992년에는 마침내 64메가 D램을 세계최초로 만들어내면서 반도체 강자로 올라섰다. 이 회장의 결단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1993년엔 기존 6인치 웨이퍼가 주류를 이루던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은 8인치 생산을 결단했다. 삼성은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 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90년대 앞서나가던 NEC, 도시바, 후지쯔 등이 불안정한 업황 때문에 주저하는 와중에도 과감한 결단력을 앞세워 지속적인 투자를 해온 것이 결실을 맺었다. 작년 말 기준 상성전자의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D램 41.4%, 낸드플래시는 27.9%로 독보적 1위를 지키고 있다.
삼성의 현재 또다른 축인 휴대폰 사업에서도 이 회장의 결단력은 주효했다. 삼성은 1994년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하며 휴대폰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후 시장 진출 1년만에 글로벌 1위인 모토롤라를 제치고 국내 시장 점유율 51.5%를 차지하며 이른바 ‘애니콜 신화’를 이뤄냈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선언 이후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며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하기도 했다. 삼성 휴대폰 사업은 또 한차례 위기를 맞았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이며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피처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지지부진한 경쟁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무선 사업부를 전면에 배치하는 체질 개선으로 초강수를 뒀고, 삼성 휴대폰 기술을 총 집약한 갤럭시S를 출시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을 양강체제로 바꿔놨다. 갤럭시S는 출시 7개월만에 전세계적으로 1000만대가 팔렸고 이후 애플을 제치고 스마트폰 점유율 1위에 올라서면서 스마트폰 시장의 대표 선두주자로 올라섰다. 삼성의 스마트폰은 최근 점유율 22.4%로 전세계 1위를 차지했다.
취임할 당시 쫒아가던 입장에서 이제는 거센 추격을 받는 기업으로 변모한 것이다. 올해 영국 브랜드파이낸스가 선정한 글로벌 브랜드 랭킹에서도 삼성은 애플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이 회장 취임 후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가 배출한 역대 '월드 베스트' 제품은 총 9개다.
점유율 기준 스마트폰(2012년·SA), 스마트카드 IC(2006년·ABI), 모바일 CMOS 이미지센서(2010년·TSR)와 매출액 기준 TV(2006년·디스플레이서치), 모니터(2007년·IDC), D램(1992년·아이서플라이), 낸드플래시(2002년·아이서플라이), 모바일AP(2006년·SA)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누구보다 많이 공부했다" 이 회장의 오랜 꿈 자동차=이 회장의 오랜 꿈이었던 자동차 사업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회장 취임 직후부터 태스크포스가 구성되는 등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키우겠다는 이 회장의 결정이 있었다.
이 회장은 본인의 에세이에서 이 회장은 에세이에 "나는 자동차 산업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전 세계 웬만한 자동차 잡지는 다 구독해 읽었고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 경영진과 기술진을 거의 다 만나봤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고 10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해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1994년 삼성의 승용차사업 기술도입신고서가 수리되면서 이 회장의 자동차 사업 꿈은 현실화됐다. 이듬해에는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이 착공됐다. 이 회장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때 평소 타던 벤츠 대신 삼성자동차 최고급 사양 모델인 SMS525V를 타고 가는 등 애착을 보였다.
그러나 그러나 당시 삼성자동차는 차 한 대를 팔 때마다 150만원의 손실이 나던 사업체였다. 기아차 도산 사태와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금융당국은 삼성에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이 회장은 눈물을 머금고 삼성자동차를 포기한다. 법정관리에 맡기고 이 회장이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 350만주를 채권단에 증여하기로 약속한다. 근로자와 하청업체에 대한 보상안도 내놓았다. 삼성자동차는 2000년 르노에 인수됐다.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도 유명하다. 삼성은 그룹에 신입사원이 입사하면 가장 먼저 소집되는 삼성인력개발원이 대표적이다. 현재도 삼성은 학벌, 지연 아닌 철저한 실적 위주 인사가 자리잡은 기업으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