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수사원(飮水思源·우물 물을 먹을 때 이 우물을 만든 사람을 생각한다)이라는 말을 항상 되새기면서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론을 스스로 디자인하는 인재가 되어 주길 바란다”(최태원 SK 회장, 2023년 7월 10일 한국고둥교육재단 장학증서수여식에서)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로마제국의 귀족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노예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진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 지도층이나 상류층은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러 기업을 거느리며 막강한 재력과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재벌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임) 실천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경기침체로 사회환원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 보다 높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로 이어지며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에 나서고 있는 재벌가의 모습을 살펴봤다.
○ 최종현-최태원, 반세기 넘은 한국고등교육재단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1929~1998)이 설립한 비영리 공익법인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설립된 지 반세기가 넘었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은 지난 1974년 '10년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고, 100년을 내다보며 인재를 키운다는 십년수목 백년수인(十年樹木 百年樹人)'의 신념으로 설립했다. 최 선대회장은 당시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이지만, 인재를 키우면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최 선대회장은 매년 유학생을 선발해 해외로 보냈고 학비와 생활비를 전액 지급하며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박사를 포함해 재단이 장학 사업을 통해 배출한 인재는 박사 1000여 명을 포함 5000명이 넘는다. 그러면서 장학생들에게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유학 후 SK(당시 선경) 관련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같은 조건은 하나도 없었다.
1호 유학 인재인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한국인 최초 미국 하버드대 종신교수인 박홍근 교수, 미국 예일대 첫 아시아인 학장인 천명우 교수, 이대열 존스홉킨스대 교수, 염재호 태재대 총장,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 김용학 전 연세대 총장 등이 재단 장학생 출신이다.
최태원 SK 회장은 "경영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사람"이라는 선대회장의 유지를 이어 적극적으로 재단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최 회장은 1998년 제2대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국제학술교류 사업과 청소년 대상 지식 나눔 등으로 재단 활동 영역을 넓혔다. 2018년엔 SK㈜ 주식 20만주(당시 약 520억원)를 출연해 최종현학술원을 설립했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우수 인재의 해외 유학 지원 등 ‘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종현학술원은 국내외 저명 학자들이 모여 지정학적 리스크 및 과학기술 등을 연구하는 ‘지식 교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정몽구-정의선, 40여년 한국 양궁 후원
현대자동그룹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까지 3대에 걸쳐 40년 넘게 양궁협회를 후원하고 있다. 국내 단일 종목 스포츠 단체 중 최장기 후원 기록이다. 그간 현대차그룹(전 현대그룹 포함)이 후원한 액수는 500억원 수준이다. 현대차그룹은 세계양궁연맹의 최대 후원사로 국제 양궁계에 꾸준한 지원을 바탕으로 스포츠 외교에 앞장서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기업들에 체육 종목 단체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대한체육회장이던 정 창업주가 선택한 종목이 양궁이다. 1983년 대한체육회는 국궁과 양궁의 분리를 결정했고 그해 초대 대한양궁협회장으로 정 창업주의 6남인 정몽준 아산재단이사장이 취임했다. 1985년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2대 회장을 맡았다. 정 명예회장은 이후 양궁협회장 이후 4연임했다. 정의선 회장은 지난해 12월 제14대 대한양궁협회 회장에 당선되며 2005년 이후 6연임에 성공하며 2029년까지 한국 양궁을 이끈다.
정 회장은 부친 정몽구 명예회장이 마련한 기반 위에 한국 양궁의 수준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대(代)를 이은 현대차의 지원 속에 한국 양궁은 세계무대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양궁은 대한민국 스포츠 종목 중에서 역대 누적 금메달 32개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양궁은 지난해 파리올림픽에서 전 종목을 석권하며 최강국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여자 대표 팀은 올림픽 단체전 10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의 연구개발(R&D) 기술을 접목해 한국 양궁의 경쟁력을 더욱 향상시켰다. 훈련용 인공지능(AI) 슈팅 로봇을 개발하고, 화살 선별 슈팅머신, 심박수 측정 장치, 선수 맞춤형 활 그립 등으로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도왔다. 유소년 대표 선수단을 신설하고, 전국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양궁 장비를 무상 지원하는 등 꿈나무 육성과 양궁 대중화에도 힘썼다. 2016년 정몽구배 한국양궁대회 등 각종 대회를 창설해 종목 저변을 넓혔다. 2005년부터 아시아양궁연맹 회장도 겸하고 있는 정 회장은 해외선수 육성 지원, 순회 지도자 파견 등 아시아 양궁 발전과 스포츠 외교에도 힘쓰고 있다.

○ 서성환-서경배, 서경배과학재단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은 2016년 3000억원의 사재(私財)를 출연해 '서경배과학재단'을 설립했다. 개인 자금으로 설립된 국내 첫 기초과학재단이다. 재단은 매년 기초과학, 특히 뇌과학과 유전체 등 생명과학 분야의 국내외 신진 한국인 과학자를 발굴해 최대 25억원까지 연구비를 지원한다.
서 회장이 기초 과학을 지원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 고 서성환 선대회장의 영향이 컸다. 서 회장은 1997년 서성환 선대회장의 뒤를 이어 아모레퍼시픽 대표에 취임했다. 서 회장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서성환 태평양 창업주)는 항상 과학기술 발전 없이는 사회 발전도 없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아모레퍼시픽 창업자로 2003년 1월 9일 타계한 서성환 회장은 태평양장학문화재단(1973), 태평양학원(1978), 태평양복지재단(1982)을 잇달아 설립하며 인재 양성에 애쓴 것으로 유명하다. 서경배 회장의 장녀 서민정 럭셔리브랜드 디비전 AP담당은 2012년 서 회장이 보유한 이니스프리 지분 18.18%(4만4450주)를 증여받았는데, 지난 2023년 6월 이중 2만3222주(9.5%)를 서경배과학재단에 기부금으로 출연했다.

○ 조석래-조현상, 민간 외교관 역할
효성가는 2대에 걸쳐 한국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조현상 HS효성 부회장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기업 부문 자문기구인 기업인자문위원회(ABAC) 의장을 맡고 있다. ABAC는 APEC에 민간 기업 목소리를 담기 위해 설립한 자문기구로 21개 APEC 회원국이 선임한 60여 명의 민간기업 위원으로 꾸려진다. 이들은 역내 경제 교류 활성화를 위한 경제계 의견을 APEC 참가 정상들에게 전달한다. 조 부회장은 올해 네 차례 회의를 주재하고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APEC에서 기업인의 제안을 담은 건의문을 전달할 예정이다.
2006년부터 다보스포럼에 참석하고 있는 조 부회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기업산업자문위원회(BIAC) 이사, 한국·베트남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비즈니스 및 민간 외교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조 부회장의 부친인 고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은 한국 기업사의 1세대 민간 경제 외교관이었다. 2000년 한미재계회의 위원장을 맡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필요성을 가장 먼저 공식 제기했다. 조 명예회장은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한미재계회의, 한일경제협회,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한중재계회의 등 여러 국제경제협력체의 수장을 맡아 민간 경제외교에 힘을 쏟았다. 조 명예회장은 민간 외교활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9년 일본 욱일대수장, 1980년 덴마크 다너브러 훈장을 수훈받았다.

○ 안유수-안성호, 지역사회 봉사
에이스침대는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 한다는 경영철학 아래 30여 년간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에이스경암 재단은 에이스침대 창업자인 고 안유수 전 이사장이 2008년 사회 공헌 사업을 위해 설립한 복지재단이다. 안 전 이사장이 2023년 별세한 뒤로 아들인 안성호 에이스침대 대표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안유수 이사장은 '힘든 시기일 수록 더욱 사회와 함께해야 한다' 강조했고, 그의 가르침은 아들인 안성호 대표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재단은 1999년부터 설·추석 명절 때마다 에이스침대 본사가 있는 경기 성남시에 쌀을 기부해왔다. 현재까지 기부한 쌀은 총 16만760포(38억3000만원 상당)에 달한다. 재단은 쌀 기부 외에도 여러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에이스침대는 지난해 1월 경기 이천시 에이스경로회관을 신축해 재개관했다. 이 곳은 2003년 10월 문을 연 후 운영이 중단된 2020년까지 17년간 83만명에게 무료 식사를 대접했다. 그후 코로나19로 운영이 잠정 중단됐다. 안 대표가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위해 3년 만에 최신 시설을 갖춘 신축 건물로 재탄생했다. 국내 최초 루게릭 요양센터 ‘승일희망요양병원’ 건립에 2년 연속 성금을 냈다.
이들 외에도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울산 종하이노베이센터 재건립에 개인 재산을 출연한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과 부친에 이어 안중근 열사 숭모 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이상현 태인 대표, 부친에 이어 캄보디아서 수십 년째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동훈 SK바이오팜 사장, 아버지에 이어 부산JC 회장으로 활동 중인 최현욱 골든블루 부실장 등도 선행으로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계엄령, 대통령 탄핵, 저성장 양극화 등으로 인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명예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사회 지도층의 실천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희망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