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저가 공세가 트럼프보다 무섭다"
최근 화웨이가 소비자용 1TB SSD 제품을 한국에 출시하면서 32달러에 판매한다고 밝혔다. 최근 높아진 환율을 감안해도 4만7000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1TB SSD가 10만원 이상으로 거래되고 있는 것을 보면 반값도 안 된다.
중국의 전기차 업체 BYD도 다음 달 16일 국내 미디어를 대상으로 공식 출범 행사를 갖는다. 지난 1년간 딜러사들과 계얄 체결 등 사전작업으로 전국 15곳의 전시장을 마련했다. 초기 주력 모델로는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아토3, 중형세단 씰, 소형 해치백 돌핀 등이 예상된다.
중국 스마트폰 기업인 샤오미도 최근 서울 을지로 미래에셋센터원 빌딩에 한국 법인인 ‘샤오미테크놀로지코리아’를 설립했다. 20명 안팎의 직원이 근무를 시작했으며 사업 전략 수립을 마친 뒤 조만간 출범식을 열 계획이다.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와 자동차, 스마트폰 등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산업에 중국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중국산 반도체와 전기차,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국내에도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해당 제품을 생산하는 국내 주요 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
올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레거시 반도체'라고 불리는 DDR4급 D램과 일부 낸드 플래시에서 중국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평가를 받았다. 양사의 제품이 기술력과 내구성 등에서 월등하지만 중국 제품과의 가격 경쟁력에서는 크게 밀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반도체 공습이 시작되면서 잠깐의 호황 이후 1년도 안 된 사이에 D램, 낸드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모두 하락했다.
지난해 글로벌 3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미국의 마이크론이 모두 감산하며 가격을 조정하며 업계는 반도체 슈퍼 사이클을 기대했다. 하지만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제조기업인 창신메모리(CXMT)와 푸젠진화(JHICC)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DDR4 D램을 양산하고 0.75~1달러에 공급하며 전체 시장 가격 하락을 주도했다. 결국 값싼 D램의 양산에 한국과 미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의 수익성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들도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레거시 반도체 시장에 대한 점유율 확대가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박상욱 신영증권 연구원은 "중국을 간과했던 것이 문제"라며 "연말 반도체 주가는 연일 하락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중국 공급 증가 리스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메모리 시장 내 중국 기업들의 비중은 2025년 말 두 자릿수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한다"며 "기술 격차가 다소 적은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낮은 단가에 많은 물량을 쏟아내는 전략을 활용한다면, 점유율은 올리면서 단가 경쟁에서 선두 업체들을 제칠 수 있다는 의견이 확대된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시장도 문제다. BYD의 공식 출범을 앞두고 국내 소비자 중 30%가 구매 의향이 있다는 설문조사가 나왔다.
이달 30일 리서치 기관 나이스 디앤알(NICE D&R)이 국내 자동차 소비자 767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30.4%가 'BYD 차량을 구매할 의향이 있다'고 답변했다. 중국산 테슬라 구매 의향(13.2%)와 중국산 전기차 구매 의향(24.0%)에 대한 긍정적 답변보다 높은 수준이다.
BYD가 꾸준한 대내외 마케팅을 펼치고 시중에 판매되는 전기차 대비 가격 매력도, 성능 검증의 기간이 이어지면서 국내 소비자들의 인지도와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BYD가 초기 국내 시장에 선보일 주력 모델로 소형 SUV 아토3가 있다. 아토3는 보조금 적용 시 2000만원 후반에서 3000만원대 구매할 수 있다. 1회 충전 주행거리도 400㎞ 이상을 확보했다.
우선 국내 대표 완성차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에 당장 큰 피해를 주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 기아의 전기차도 비슷한 가격에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캐스퍼 전기자동차(EV)는 보조금 적용시 2000만원대에 기아 EV3는 3000만원대에 각각 구매할 수 있다. 게다가 중국 전기차에 쓰이는 저렴한 LFP배터리 대신 니켈·코발트·망간(NCM) 배터리를 탑재해 주행거리 문제를 보완했다.
화웨이의 32달러 SSD도 국내 런칭 이벤트로 진행된 제품이다. 국내 소비자들도 내구성이나 실제 성능, 보안 등의 이슈로 중국산 제품을 꺼려하고 있으며 실제 반도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워 보인다. 비슷한 이유로 샤오미의 국내 진출도 당장의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그럼에도 중국의 저가 공세가 지속되면서 중국산 제품이 품질은 좋지 않지만 저렴하게 쓸만하다는 인식이 대중에 뿌리 박히면 반도체, 자동차, 스마트폰 시장의 판도가 바뀔 가능성도 충분하다.
실제 TV,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에서 국내 기업들이 프리미엄 시장은 어떻게든 지켜나가고 있지만 저가 제품은 중국산 제품이 거의 독점하고 있다. 의류나 생활용품 등 단순 공산품 시장은 이미 오래전에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2024년 나의 실수' 보고서를 통해 "중국 개별 기업들의 약진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라며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부터 시작됐던 대중 규제가 중국과 경합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겐 나름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봤는데, 그 시효가 거의 다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 센터장은 "중국은 기술 혁신뿐 아니라 덤핑 공세로도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며 "중국이 글로벌 생산이나 교역에서 규칙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평가가 많지만 이를 제어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올해와 내년을 넘어 중장기적으로 한국 기업에 가장 큰 허들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가 아닌 중국의 저가 제품 공세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