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웨어러블 헬스케어 기업이 스마트밴드를 개발했습니다. 신체 리듬과 밸런스를 정확하게 측정할 정도로 기술 면에서 뛰어났죠. 그러나 이 디바이스를 헬스케어 용도로 만들다 보니 시간을 알아볼 수 있는 디스플레이와 위치정보시스템(GPS) 기능이 없어 소비자들은 이 제품을 외면했습니다. 접촉했던 모든 벤처캐피털(VC)은 투자를 거부했죠. 결국 이 회사 대표는 급여 체납이 수개월째 지속되자 직원들을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본업과 전혀 상관없는 정부 과제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읽은 책 '스타트업 성공 방정식'에 소개된 사례다. 이 기업이 적기에 투자를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질문을 바꿔, 창업가들이 투자 받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투자'는 '생존 1법칙'이다. 서울신용보증재단에 따르면 2023년 기준 1년차 전국 소상공인 생존율은 64.1%다. 5년차 생존율은 약 30%로 절반으로 준다. 우리나라는 다른 국가보다 5년차 기업 생존율이 10%포인트 이상 낮다. 2019년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각국의 창업 5년차 생존율'을 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41.7%인 반면 우리나라는 29.2%였다.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다. 폐업 신고를 한 사업자가 역대 최대폭으로 늘어 100만명에 육박했던 지난해, 스타트업 업계도 직격탄을 맞았다. 실제 작년 모태펀드 예산은 3135억원으로, 전년(5200억원)보다 약 40% 줄었다. 스타트업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스타트업이라고 무조건 육성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 시장을 혁신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역할은 톡톡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스타트업이 어려울 때 우산을 주는 금융사들이 반갑다. 지난달 은행을 필두로 4대 금융그룹(KB·신한·하나·우리)과 IBK기업은행은 모두 스타트업 지원에 나섰다. 금융사들은 자체적으로 혹은 정부와 함께 해마다 많게는 두 번씩 스타트업을 선발해 육성한다. 연례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스타트업이 투자 빙하기를 지나고 있을 때 은행들이 스타트업 지원에 나선 모습은 더욱 빛난다.
다만 인공지능(AI), 핀테크, 프롭테크, 빅데이터, 페이먼트 등 '디지털' '금융' 이 두 단어와 연관이 깊은 스타트업에 지원이 쏠리는 점은 아쉽다. 금융사들은 은행·증권·카드 서비스에 접목할 수 있는 플랫폼·콘텐츠를 가진 스타트업을 선발하는데, 초기 기업의 실질적인 성장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금융그룹 눈에 띌 만큼 기술력과 잠재력을 가진 스타트업들은 이미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투자 지위를 가졌을 확률이 높다.
'스타트업 발굴 총 000곳' '누적 투자유치 000억원' '협업 수행 00건' 발표도 좋다. 다만 스타트업 단 1곳이라도 뚝심 있게 지켜보고 긴시간 제대로 키워내 금융사들이 자랑하는 사례 또한 듣고 싶다. '시간'은 '생존 2법칙'이다. 우산은 고맙지만,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스타트업에게 접근할 '용기' 역시 지닌 금융사들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