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재계


5만엔에서 매출 83조 기업까지…한국 재계의 '거인' 신격호

일본에서 빌린 5만엔으로 시작해 재계 5위 롯데그룹 일궈
한국 제과·호텔·유통에 선구적 투자…월드타워 '숙원' 이뤄
명예장례위원장에 이홍구 전 총리·반기문 전 UN사무총장

 

[FETV=김윤섭 기자] 맨손으로 껌을 팔기 시작한 지 70년 만에 한국 재계 5위, 매출 83조원의 롯데그룹을 키워낸 신격호(辛格浩) 롯데 명예회장이 19일 99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롯데그룹은 이날 공식 입장 자료에서 "노환으로 입원 중이던 신 명예회장은 지난 18일부터 병세가 급격히 악화했으며 19일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고 밝혔다.

 

장례는 롯데그룹의 창업주인 고인을 기리고자 그룹장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명예장례위원장은 이홍구 전 국무총리,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이 맡는다. 장례위원장은 황각규 롯데지주 대표이사, 송용덕 롯데지주 대표이사가 담당한다.

 

신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비누와 껌으로 일군 사업을 기반으로 한국에 투자해 제과·관광·유통·면세업 등을 세계적 반열에 올려놓은 명실상부 '현대 한국 최고 경영자' 한 명이자 재계의 거인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말년에는 두 아들의 치열한 경영권 다툼을 지켜보며 정신감정까지 받은 비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 홀로떠난 日서 빌린 5만엔으로 비누·껌 사업 시작해 재계 5위까지

 

신 명예회장은 1922년 10월 4일(등본상 생년월일이며 실제로는 1921년 11월 3일) 경남 울산 삼남면(三南面) 둔기리(芚其里) 한 농가에서 부친 신진수, 모친 김필순씨의 5남 5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일제 탄압이 극에 이른 상황에서도 부친의 남다른 교육열 덕에 그는 언양(彦陽)소학교, 울산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도립 종축장에서 기사로서 첫 직장을 잡았다. 하지만 가족과 자신을 위해 더 '큰 일'을 하고 싶었던 스무 살 청년 신격호는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1941년 일본행 관부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도쿄에서 낮에 우유·신문을 배달하고 밤에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간다(神田) 소재 예비학교에 다니는 고단한 고학생이었지만, 신 명예회장은 특유의 친절과 신용으로 주문이 밀려들자 자신도 배달원이면서 배달원을 고용할 만큼 일찌감치 탁월한 경영능력을 드러냈다.

 

그의 역량을 알아본 일본인 하나미쓰(花光)로부터 5만 엔을 투자받아 선반(절삭공구)용 기름 제조에 나섰으나, 두 차례나 공장이 미군의 공습을 받는 좌절도 겪었다.

 

1946년 3월 와세다고등공업 이공학부를 졸업한 그는 다시 도쿄 시내에 직접 붓으로 쓴 '히까리(光) 특수화학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선반용 기름으로 비누·포마드·크림 같은 유지 제품을 만들었다. 패전 후 극심한 생필품난에 허덕이던 일본에서 신 명예회장의 수제 비누는 생산하기 무섭게 동났고, 1년도 되지 않아 5만엔의 빚을 모두 갚을 만큼 돈을 벌었다.

 

1947년 4월 마침내 신 명예회장은 롯데의 상징이자 뿌리인 껌을 다음 사업 아이템으로 주목했다. 점령군 미군 군수품을 흉내 낸 조악한 품질의 초산비닐 수지 껌이 넘쳐날 때, 그는 남미산 천연수지로 당시 최고 수준의 껌을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직접 리어카를 끌면서 팔기도 하던 신 회장의 껌은 일본에서 인기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후속제품들도 잇달아 히트했고,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자 껌은 일본에서 갑자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이후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법인사업체 ‘롯데’가 탄생했다.

 

상호 롯데는 신 명예회장이 고학생 시절 밤새워 읽었던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이 여인처럼 모든 제품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는 의미였다.

 

훗날 신 명예회장은 스스로 "롯데라는 신선한 이미지를 바로 상호와 상품명으로 택한 내 결정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 수확이자, 걸작 아이디어"라고 회고할 만큼 자신의 '작명'에 만족했다.

 

롯데는 당시 일본 껌 시장의 70%를 장악했고, 초콜릿(1963년)·캔디(1969년)·아이스크림(1972년)·비스킷(1976년) 등을 잇달아 내놓고 종합 제과기업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의 천부적인 마케팅 감각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껌 회사로 탄생한 지 40년도 채 되지 않아 1980년대 중반 이미 롯데는 일본에서 롯데상사, 롯데부동산, 롯데전자공업, 프로야구단 롯데오리온즈(현 롯데마린스), 롯데리아 등을 거느린 재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 한국 제과·호텔·백화점에 선구적 투자…“국가와 사회에 봉사하겠다”

 

일본에서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신 명예회장은 고국으로 눈을 돌렸다.

 

1959년부터 한국에서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세워 껌· 캔디·비스킷·빵 등을 생산했지만, 한국의 동생들에게 전적으로 경영을 맡기고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에나 일본 자본의 한국 투자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신 명예회장의 본격적 한국 경영은 1965년 12월 18일 한일 국교 정상화, 1966년 6월 17일 재일동포 법적 지위 협정 체결·발효 등으로 고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린 뒤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때 일본에서 벌어들인 돈을 한국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L투자회사 등이 개입하면서 현재 문제로 지적되는 '일본 기업' 논란 등의 단초가 된 것도 사실이다.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신 명예회장의 꿈은 조국 대한민국에 기여하는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기업보국’(企業報國)이라는 기치 아래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해 투자를 시작했다.

 

당초 신격호 명예회장은 제철업에 관심을 두고 정부에 국내 제철공장 설립안까지 제출했으나 '철강 국영' 논리를 앞세운 정부에 의해 좌절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신 명예회장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선 제과업을 시작으로 고국 투자에 나섰다. 1967년 4월 자본금 3000만원으로 롯데제과주식회사를 세우고 당시 국내 처음으로 멕시코 천연 치클을 사용한 고품질 껌을 선보이면서 한국에서도 '껌 왕국'으로서 명성을 쌓았다.

 

왔다껌, 쥬시후레쉬, 스피아민트, 후레쉬민트 등이 '대박' 행진을 거듭했고, 1972년 이후 빠다쿠키, 코코넛바, 하이호크랙커 등 다양한 비스킷 제품도 쏟아냈다. 롯데제과는 1973년 당시 제과업체로는 드물게 기업 공개를 결정했고, 창립 8년만인 1974년 연간 매출이 100억원을 넘어섰다.

 

신 명예회장은 1974년과 1977년 칠성한미음료, 삼강산업을 인수해 각각 롯데칠성음료, 롯데삼강을 설립하면서 국내 최대 식품기업의 모습을 갖춰갔다. 이후 아이스크림, 햄, 우유 사업에 뛰어들었고 국내 최고 패스트푸드 브랜드인 롯데리아까지 론칭했다.

 

아울러 그는 식품 외 관광과 유통을 고국에 꼭 필요한 '기반사업'으로 주목하고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호텔 사업에도 뛰어든 것이다.

 

신 명예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뤄내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1973년 지하 3층, 지상 38층, 1000여 객실 규모의 당시 국내 최고층 건물, 동양 최대 특급호텔로 문을 연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이 그것이다. 롯데호텔 완공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와 거의 비슷한 수준인 1억5000만 달러의 막대한 돈이 들어갔다.

 

유통 분야에서도 신 명예회장의 투자는 선구적이었다. 1979년 개장한 소공동 롯데백화점의 규모(지하 1층~지상 7층)는 기존 백화점의 2~3배에 이르렀고, 영세 백화점이 난립한 당시 유통업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선진국 백화점에 견줄 만큼 질 측면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비슷한 시기 신 명예회장은 평화건업사 인수(1978년·현 롯데건설), 호남석유화학 인수(1979년·현 롯데케미칼) 등을 통해 건설과 석유화학 산업에도 진출했다.

 

식품-관광-유통-건설-화학 등에 걸쳐 진용을 갖춘 롯데그룹은 1980년대 고속 성장기를 맞았고, 기네스북인 인정한 '세계 최대 실내 테마파크' 서울 잠실 롯데월드도 1989년 문을 열었다. 신 명예회장은 1990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집계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에 오르기도 했다.

 

1990년대에도 신 명예회장은 편의점(코리아세븐), 정보기술(롯데정보통신), 할인점(롯데마트), 영화(롯데시네마), 온라인쇼핑(롯데닷컴), SSM(롯데슈퍼), 카드(동양카드 인수), 홈쇼핑(우리 홈쇼핑 인수) 등으로 계속 사업 영역을 넓히며 롯데를 재계 서열 5위로 끌어올렸다.

 

"언제까지 외국 관광객에게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다. 잠실 일대에 종합 관광단지를 개발하고 세계적 명소를 만들어야 한다"며 신 명예회장이 그룹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2010년 11월 착공한 국내 최고(123층·555m), 세계 5~6위권 고층 건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는 2017년 4월 공식 개장했다.

 

신 명예회장은 지난해 1월 16일 집무실 겸 거처를 소공동 롯데호텔 신관 34층에서 롯데월드타워 49층으로 옮기면서 평생의 숙원 사업을 완성했다. 하지만 가정법원의 결정으로 1년 5개월 만에 거처를 다시 소공동 롯데호텔로 옮긴 그는 결국 30년 가까이 집무실 겸 거처로 사용하던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 경영권 다툼에 정신감정까지…말년 고초

 

신 명예회장은 2011년 2월 차남 신동빈 회장을 한국 롯데그룹 회장에 임명하면서 사실상 경영 2선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룹 경영 실적이나 사세와는 별개로, 신 명예회장은 타계 직전 3~4년을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 두 아들의 경영권 분쟁에 휘말려 큰 곤욕을 치렀다.

 

2015년 7월 15일 신동빈 회장이 일본 롯데홀딩스 정기이사회에서 대표이사 부회장에 선임돼 한·일 롯데를 총괄하는 '원톱' 자리에 오르자 같은 달 27일 형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신격호 명예회장을 앞세워 일본 롯데홀딩스에서 신동빈 회장을 해임하면서 경영권 분쟁이 격화됐기 때문이다.

 

신 명예회장은 결국 이 사건으로 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전격 해임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이어진 신동주·동빈 형제간 경영권 다툼에서 신격호 명예회장의 정신건강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고, 결국 2016년 8월 한정후견인이 지정됐다.

 

법원이 그의 정신건강 등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법적 능력을 제한한 것이다.

 

2017년 8월에는 롯데알미늄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롯데그룹 내에서 모든 공식 직책을 내려놓고 사실상 이름뿐인 회장이 됐다. 같은 해 12월에는 회삿돈 횡령 및 배임 사건 관련 재판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령이란 이유로 겨우 법정구속은 면했다.

 

재계 관계자는 "전후 70년대까지도 불모지였던 한국의 제과·관광·유통 부문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업적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면서도 "일에 대한 열정이 지나쳐 적절한 후계자 선정 시점을 놓친 점이 옥에 티일 뿐"이라고 안타까움을 내비쳤다.